김수철목사, 아이티로 날아가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0-02-07 14:59
조회수 3,270
아이티 구호 활동기
(출발 전)
컵 라면 20개로 시작한 한국에서의 노숙자 사역이 많은 열매를 맺어 창립5주년이 되었다. 1,000여명의 서울역 노숙자들에게 아침을 제공하는 일로 시작하여 노숙자전용교회가 세워져 매일 예배가 드려지며 자활센터가 세워져 이제 서울시가 지원하는 쉘터로 운영되는 큰 단체로 성장되었다. 더욱이 2년 전에는 재난으로 큰 고통속에 빠진 미얀마에 고아원을 세우는 일로 시작된 소중한아이들 사역이 북한, 엔시나다, 중국도문, 베트남로 확장이 되어 나갔다. 창립5주년감사예배에서는 이러한 일들을 감사하는 예배로 감격스럽게 드려졌다. 예배를 마치고 다음날 바로 몽골로 날아가 그곳에서도 고아원사역을 위한 건물구입에 대해 논의를 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미국 로스앤젤레스 행 비행기에 올랐다. 일간신문에 아이티에 관한 기사가 지도와 함께 실렸다. 아이티가 미국과 그렇게 가까이 있는 줄은 몰랐다. 또한 내가 맡고 있는 미주총회의 사회복지부장이면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할 문제였다. 미국에 도착하여 미주총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총회장은 개 교회별로 할 사안이라며 임원회에서 논의하겠다고 한다. 지금아이티에서는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고 하는데...
8년간 매일 홈리스들에게 무료급식 해오던 터라 우리 소중한사람들이야말로 그곳에 가면 할 일이 많아 보였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미국이 바로 아이티의 이웃이라는 말씀을 나에게 하시는 것 같았다. 혼자라도 아이티로 가겠다는 생각에 현지선교사들과의 연락을 시도했다. 월드그레이스미션이라는 도미니카에 있는 한인선교단체가 연결이 되었고 함께 동역하는 전 십자군전도대장정예직목사와 동행하기로 하고 2월2일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출발하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 그곳에 가는 경비와 구호물자를 구입할수 있는 모든 자금과 사람들을 이미 준비시켜놓은 곳이다.
(출발 일과 아이티 현장에서)
2월2일(화)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침 7시 비행기로 미국 동부 훌로리다를 거쳐 10시간만인 산토도밍고공항에 도착하였다. 우리를 영접한 선교사님을 따라 선교센터에서 1박을 한 후 새벽6시에 아이티로 출발을 하였다. 서울소망장로교회 부목사님과 집사님 1명 그리고 월드그레이스미션에서 2명의 선교사, 아이티 선교사 1명, 물건을 가득실은 탑차 2대와 우리를 태운 미니버스 1 대, 우리구호품을 실은 트럭1대 4대의 차와 우리를 포함 7명이 동승을 하였다. 아이티로 가는 길은 비교적 좋았고 도미니카공화국은 살기가 좋은 나라였다. 그러나 아이티 국경을 넘으니 천국에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한 동네를 지나는데 버스들은 이상한 색깔로 치장을 한 것이 정상적인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버스 같지가 않았다. 완전히 검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섬으로 들어온 것이다. 사람들의 걸음은 느렸고 할 일없이 빈둥거리는 것 같았다. 그 동네는 지진 피해지역은 아니었지만 박병준 현지선교사 말에 의하면 지진이 나기 전에도 이 나라는 희망이라는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빛이 전혀 비쳐지지 않는 어둠의 나라였다고 한다. 아이티에는 미국의 선교사가 3,000명이나 가있는 나라이고 미국에는 100만명의 아이티인이 살고 있으며 미국에서 송금해 오는 돈으로 생활을 연명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현지 선교사가 전했다. 미국선교사들이 그렇게 많지만 삶을 나누지 않았기에 아이티에는 지도자들이 나오지 않았고 휼륭한 크리스천들이 없다는 설명을 했다. 그런데 현지선교사는 불과 3명 뿐이라는 말에 놀랐다. 우리교단뿐아니라 타 교단에서도 빨리 선교사들을 파송해야한다는 막연한 생각이 스치는 가운데 우리는 미군부대에 도착을 했다. 선교사의 설명은 현재 구호물자를 나누는 일이 위험하여 미군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불가하다는 설명을 들어 아마도 물자만을 내려놓고 나올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터라 큰기대를 하지 않았다. 얼마안있어 미군들안에 한국인들도 끼여 있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군목이 한국사람이었는데 함중위라는 분이었다. 미군들도 이 나라를 돕기위해 왔는데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입장이라서 군목들의 역할이 특별히 필요한 때임을 생각하며 이 부대의 영적인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는 군목을 위해 기도를 했다.
기대밖에 구호물건이 너무 많아서 인지 미국 1개 소대의 호위와 2대의 장갑차 호위를 받으며 우리는 구호물건을 나누기 위해 가장 어려운 지역인 빈민촌인 솔레익시티로 갔다. 군인들은 도착하자 일사분란하게 바리케이트를 쳤다. 우리는 앙님촌의 사람들이 줄을 서는 것을 보면서 옥수수 가루를 5개씩 나누기 시작하였다. 질서는 미군과 유엔군 덕분에 잘 유지되었다. 몇 분 후 미군소대장이 우리에게 나누어주는 시간이 많지 않다고 하면서 1박스 씩 나눌 것을 요구하였다. 우리는 남자도 들고 가기 어려운 분량의 옥수수 가루를 한 푸대씩 나누어 주기 시작하였다. 약한 여자들이나 아이들 머리위에 무거운 옥수수 가루 한 포대를 올려놓아야 한다. 어린아이는 비틀거리다가 쓰러져 소망교회에서 온 박도연집사님의 도움을 받아 집까지 배달해 주었다. 도와준 박집사님은 사진을 찍어왔는데 텐트 안에는 박스조각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줄은 어느덧 천 명이 훨씬 넘어보이는 난민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줄을 선 사람들 가운데 젊은 여성은 거의가 임신 중이었다. 나아 키울 수 없어 아이를 버리는 여성들이 분명 많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많은 고아원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물건은 이제 옥수수가루에서 식용류로 통조림으로 빵으로 바뀌어 나누이면서 아직도 500포대의 쌀과 한 차분의 분량이 남아있어 1,500여명이상을 주고도 남을 분량이다. 우리는 약 6만불어치의 구호물건을 싣고 왔다. 3,000명은 족히 나누어줄 수 있는 분량이었다. 그러나 1,000명이 오고나서 부터는 질서가 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많은 물건이 남아 있을 것을 상상치 못한 그들은 한차의 분량이 떨어져 나가자 자기차례가 오지 않는다는 판단아래 앞으로 옆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군인들은 다급하게 우리에게 청수 명령을 내렸다. 정말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지난 8년간 미국과 한국에서 1,000여명에게 밥을 나누어주던 노하우도 폭도들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말이 통하질 않으니 소리를 칠수도 없었다. 우리는 시급히 그곳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동족끼리 누구하나 이러면 안된다고 호소하는 사람도 없었다. 질서를 잡으려는 원로의 모습도 안보였다. 어른이나 지도자들이 없었다. 질서만 유지되었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을터인데... 미군들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았다면 더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미군하니까 군목, 함중위가 생각이 난다.
미국부대로 돌아와 남은 물건은 박선교사집으로 가지고 갔다. 박병준 선교사 센터에는 무척 넓었다. 방이 6개 정도이며 넓은 거실이 있는데 한 달에 500불의 렌트비를 낸다고 한다. 지금은 지진이 나서 1,500불은 나간다고 한다. 저녁식사는 컵라면, 김치도 없었다. 감사함으로 식사를 한 후 함께 앞으로의 비전을 나누며 기도하고 꿈나라로... 모기장이 있어서 모기에는 물리지 않아 좋았고 전기가 나가서 발전기로 전기를 공급하는데 11시에 발전기를 꺼서 모두 잠이 들었다.
(이틀째 아이티 현장에서)
새벽 6시에 일어나 경건회를 마치고 오늘의 일들을 의논하니 물건을 일단 박선교사 집에 내려놓고 어려운 고아원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의견이 모여졌다. 소망교회와 우리가 가지고 온 구호물건들은 거의 나누어졌는데 광염교회에서 버내온 물품들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일단 구호품들을 박선교사집겸센터에 내려놓았다. 물품이 너무 많아 힘이 들었다. 이 물건들을 난민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힘이 들지는 않을텐데.. 그러나 더 필요한 지역으로 간다니... 버스에 올라 오늘은 지진 피해지역인 대통령궁을 가 보기로 하였다. 박선교사 집에서 먼저는 백삼숙 선교사가 운영하는 고아원을 방문키로 했다. 고아원에 도착을 하니 주변의 건물들은 많이 무너졌는데 아이티어린이집은 무너지지 않았다. 10명의 고아들이 잘 자라나고 있었다. 백선교사에게 후원 상황에 대해 물었더니 후원하는 교회도 없고 개인도 별로 없다고 한다. 선교사의 말이니 그대로 믿기로 하고 아이들 개인 사진을 찍었다. 일대일 결연을 맺을 경우 일 인당 $30, 10명의 후원자를 우선 모아 고아원을 지원할 생각이었다. 고아원을 나올때 $200을 선교사님에게 주면서 아마 계속 지원이 될거라고 말했다. 말이 너무 빨랐나?? 이역만리에 와서 고아원을 운영한다는 것은 여자 혼자 힘으로 어렵지 않겠나? 우리도 무언가를 돕고 싶었다. 한번 뿐 아니라 계속적으로..
대통령궁으로 가는 길은 차도 많고 사람도 많아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다. 이제는 모든 것들이 거의 정상화되에 가는 것 같다. 물론 원상복귀를 하는데 10년이 더 걸릴지 모른다. 이 악몽 속에서 속히 벗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지만 모두들 왔다 갔다만 하는 것 처럼 보였다. 가장 어려운 지역인 솔레익시티 판자촌을 지나면서 어떻게 이렇게 못사는 나라도 있는가 싶었다. 머리에 물을 이고 다니며 물 한잔을 파는 아줌마도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사는지? 과일이란 과일은 먹을 만한 것들이 없이 버릴 것만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저 빈둥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일할 곳도 갈 곳도 없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다운타운으로 들어서니 망가진 건물들이 하나둘 보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이민국으로 아이티를 떠나려는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이었다. 30만명은 죽고 30만명은 다치고 30만명은 국외로 탈출을 하고 아이티의 수도 포타프린스에는 100만명 정도만이 남았을거라는 선교사의 전언이다.
대통령궁에 가까이 다가서자 정부기관인 어떤 건물에 몇 사람들이 건물위에서 맨손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시체가 보였다. 분명한 사람의 시체였다. 썩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에 파리떼와 구더기떼들이 몰려들고 있는데 누구 하나 치울 사람이 없었다. 정부 청사들이 모두 무너지고 죽고 그랬다. 큰 성당도 무너졌다. 주교도 죽었다고 한다. 대통령궁은 그 규모가 어마 어마 했다. 이 가난한 나라에 무슨 대통령궁이 저리도 크고 호화스럽게 지었는지 아마도 하나님이 지도자들을 심판하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웅장한 건물을 자랑하는 캐토릭성당도 여지 없이 무너졌다. 교회건물을 자랑하는 세속화된 성직자도 하나님은 심판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삶을 나누며 함께 고민하는 목회자들에게 오히려 기대를 걸어본다. 하루속히 한인선교사들이 들어와 그들과 삶을 나누며 함께 꿈꾸는 아이티를 그려본다. 그곳에서 주택가로 넘어오는데 좋은 주택가들이 거의 무너졌다. 시체 썩는 역한 냄새들이 코를 찔렀다. 마스크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다음에 간곳은 아이티의 경제도시였다. 처절하게 무너진 경제도시를 보면서 인간이 세운 모든 경제도시는 이와같이 처참하게 무너질 것을 예언한 요한계시록이 생각났다. 쇼핑센터들과 은행들 호텔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있는 자들이 더 많은 피해를 보았다. 그로 인해 국민들이 받는 고통은 어떤가 부패한 지도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노려움을 보는 것 같았다. 정말 정부는 아무일도 하지 않고 모든 백성들은 속수무책으로 지낼 수밖에 없는 무능한 정부에 국민들이었다. 그동안 바삐 움직였던 구호팀들도 모두 철수 하였고 아이티는 그저 장사꾼들외에는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없고 그저 적막한 도시였다. 아픔과 슬품을 딛고 일어선 무언가가 이제 일어나리라는 기대는 전혀 없는 그런 도시였다. 미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많은 이웃나라들이 손을 잡아야 겨우 일어설 수 있는 그런 나라였다.
(삼 일째, 아이티현장에서)
목요일 오전에는 고아원 4군데를 돌며 과자와 또 다른 구호품을 전해주었다. 리라꽈 란 동네에는 고아원이 30 군데나 있다고 하는데 오후에는 도미니카로 출발을 해야 하는 관계로 몇 군데만 열악한 고아원 현장을 살펴보면서 우리 대한민국과 미국에서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빈민촌 아이들 사진을 찍으며 옆에 같이 있기가 미안해 살며시 손 한 번씩을 꼭 쥐어 보았다. 고아원에 다니면 계속 우는 아이들이 있었다. 이번 지진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적응을 잘 하지 못하고 울기만 한다는 원장의 말에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 우리가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지...
한국의 요즘 고아원은 일반 가정들 보다 모든 지원을 정부가 잘해주고 있으며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공부도 잘 가르치고 있는데 너무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아이티 고아들, 이제 3월8일에 다시 와서 도움을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시는 도우미가 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한다. 우리 소중한 사람들에서 내일의 꿈나무들인 어린이들에게 좋은 토양을 만들어 주기를 위해 기도하면서 결연자들을 찾아 나갈 것이다. 이미 고아원을 위해서 헌신을 하고자 하는 후원자는 있어 3월에 고아원이 오픈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돌아오는 길)
아이티에서 국경을 거쳐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돌아와 하루를 자고 그 다음 날 후로리다를 거쳐 로스앤젤레스 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날 비행기 안에서 앞으로 할 일에 대해 몇 가지 정리를 했다.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구호품이다. 그보다 먼저 물과 빵일 것이다. 그리고 가족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활필수품이다. 그것들을 적시에 지급해 주어야 한다. 지금 세계 각국에서는 많은 물자들이 아이티로 들어오고 있다. 최소한 한국성결교단과 미주총회 그리고 한국교회들과 교단 선교회들은 들어가는 물건들이 사전 협의를 거쳐야 한다. 노수자사역을 오래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물건으로 전달해주고 자신이 직접 물건을 전달해주기를 원하는 단체나 교회가 있다. 이것은 선교회나 사역자들을 불신하는 풍조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이번에 우리가 경험한 바로는 절대 물건을 각기 구입해서 들여보내서는 안될것이다. 아이티현지나 도미니카공화국에 있는 현지선교사와 협의를 해야하는데 각교단에서 파송한 선교사가 아니니 평소 알지 못하니 어느 교회는 직접 도미니카현지에서 물건을 구입하여 아이티로 들어갔다. 나누어 줄때는 어느 가정은 옥수수가루만, 어느가정은 생선통조림만, 빵만, 식수만 이렇게 물건을 나누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아이티 난민들은 지혜롭게 그것들은 서로 나누어 가질 것을 기대하면 안된다. 이 모든 것들을 패케지로 만들어 보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미니카공화국 현지선교사와 사전 연락을 취해 물건을 오더하고 돈을 보내야 한다. 도미니카공화국이나 아아티선교사들 모두 믿을만한 사람들이다. 미리 물품들을 준비하도록 반 정도의 돈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나누어 중때는 아주 신숙하게 미군의 도움을 받아 나눈다면 아마 한시간 이내로 2,000명분은 나눌수 있다. 우리가 매주 월요일과 주일에 서울역에서 무료급식을 하는데 예배와 식사를 포함 한시간을 넘기지 않고 1,000명의 노숙자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간다. 문제는 나누어주는 사람들에게 있다. 사전에 많은 준비와 반드시 현지선교사들과 협의를 거쳐야 한다. 현지 선교사와의 연락은 미국을 거쳐야 아이티로 들어가기 때문에 미주총회사회복지부와 사전에 연락을 취하고 미주총회에서 도미니카나 아이티선교사와 연락을 취해서 구호품을 전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두 번째는 교회 병원 학교 고아원이 포함된 센터를 세우는 일이다. 여기에는 현지에서 현재 운영하는 곳을 지원하는 방법이 있다. 현지인과 합작을 하는 것이다. 돈을 지원해주면 운영권도 거의 갖게 된다. 그리고 잘되면 차후 현지에 법인을 세워 선교국에서 괸리하도록 하는 방법도 있다. 이것은 현지선교사와 긴밀한 연락이 필요하고 현지선교사가 감독지도를 잘 해야한다. 또 하나는 직접 센터 땅을 구입하고 센터를 건축하는 일이다. 그러려면 선교사를 반드시 파송해야 한다. 전문적인 평신도선교사를 1년 단위로 파송해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는 모든 것이 너무 열악해서 젊은 선교사보다는 오히려 나이가 든 선교사가 좋다. 건축을 하고 현지인들을 잘 가르치는 선교사가 우선 파송되어야 전체사역을 할 수 있다. 방학 때는 미국이나 한국에서 대량 학생봉사자들이 투입되는 방안도 모색해 볼만하다. 우리교단의 경우 이번기회에 자녀교육 끝난 선교사 한, 두가정 파송하는 방안도 좋을 것이다. 언어는 영어를 약간 하면 좋다. 현지 통역을 세우면 된다. 빠른 시간내에 이루어질수록 좋다.
세 번째는 복지선교의 장기적인 안목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 외국선교사들이 왔을때 학교와 병원 고아원을 세웠다. 그리고 수많은 밀가루와 옥수수가루를 공급하여 주었다. 그러나 우리의 선교방법은 먼저 교회를 세우고 신학교를 세우는 일에만 전념을 하였다. 아이티에 필요한 것은 우선 학교와 병원 그리고 고아원이다. 학교에서도 예배를 병원에서도 고아원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러면 교회는 자연히 생기게 되고 부흥하게 된다. 우선은 아이티인들에게 사랑 받는 종교로서 기독교가 서야 한다. 이번 기회에 한국의 기독교와 우리교단이 헌법27조에 나와 있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 힘주시는 대로 사람을 긍휼히 여겨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며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며 병든 자와 옥에 갇힌 자를 방문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아이티에 실천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출발 전)
컵 라면 20개로 시작한 한국에서의 노숙자 사역이 많은 열매를 맺어 창립5주년이 되었다. 1,000여명의 서울역 노숙자들에게 아침을 제공하는 일로 시작하여 노숙자전용교회가 세워져 매일 예배가 드려지며 자활센터가 세워져 이제 서울시가 지원하는 쉘터로 운영되는 큰 단체로 성장되었다. 더욱이 2년 전에는 재난으로 큰 고통속에 빠진 미얀마에 고아원을 세우는 일로 시작된 소중한아이들 사역이 북한, 엔시나다, 중국도문, 베트남로 확장이 되어 나갔다. 창립5주년감사예배에서는 이러한 일들을 감사하는 예배로 감격스럽게 드려졌다. 예배를 마치고 다음날 바로 몽골로 날아가 그곳에서도 고아원사역을 위한 건물구입에 대해 논의를 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미국 로스앤젤레스 행 비행기에 올랐다. 일간신문에 아이티에 관한 기사가 지도와 함께 실렸다. 아이티가 미국과 그렇게 가까이 있는 줄은 몰랐다. 또한 내가 맡고 있는 미주총회의 사회복지부장이면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할 문제였다. 미국에 도착하여 미주총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총회장은 개 교회별로 할 사안이라며 임원회에서 논의하겠다고 한다. 지금아이티에서는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고 하는데...
8년간 매일 홈리스들에게 무료급식 해오던 터라 우리 소중한사람들이야말로 그곳에 가면 할 일이 많아 보였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미국이 바로 아이티의 이웃이라는 말씀을 나에게 하시는 것 같았다. 혼자라도 아이티로 가겠다는 생각에 현지선교사들과의 연락을 시도했다. 월드그레이스미션이라는 도미니카에 있는 한인선교단체가 연결이 되었고 함께 동역하는 전 십자군전도대장정예직목사와 동행하기로 하고 2월2일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출발하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 그곳에 가는 경비와 구호물자를 구입할수 있는 모든 자금과 사람들을 이미 준비시켜놓은 곳이다.
(출발 일과 아이티 현장에서)
2월2일(화)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침 7시 비행기로 미국 동부 훌로리다를 거쳐 10시간만인 산토도밍고공항에 도착하였다. 우리를 영접한 선교사님을 따라 선교센터에서 1박을 한 후 새벽6시에 아이티로 출발을 하였다. 서울소망장로교회 부목사님과 집사님 1명 그리고 월드그레이스미션에서 2명의 선교사, 아이티 선교사 1명, 물건을 가득실은 탑차 2대와 우리를 태운 미니버스 1 대, 우리구호품을 실은 트럭1대 4대의 차와 우리를 포함 7명이 동승을 하였다. 아이티로 가는 길은 비교적 좋았고 도미니카공화국은 살기가 좋은 나라였다. 그러나 아이티 국경을 넘으니 천국에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한 동네를 지나는데 버스들은 이상한 색깔로 치장을 한 것이 정상적인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버스 같지가 않았다. 완전히 검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섬으로 들어온 것이다. 사람들의 걸음은 느렸고 할 일없이 빈둥거리는 것 같았다. 그 동네는 지진 피해지역은 아니었지만 박병준 현지선교사 말에 의하면 지진이 나기 전에도 이 나라는 희망이라는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빛이 전혀 비쳐지지 않는 어둠의 나라였다고 한다. 아이티에는 미국의 선교사가 3,000명이나 가있는 나라이고 미국에는 100만명의 아이티인이 살고 있으며 미국에서 송금해 오는 돈으로 생활을 연명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현지 선교사가 전했다. 미국선교사들이 그렇게 많지만 삶을 나누지 않았기에 아이티에는 지도자들이 나오지 않았고 휼륭한 크리스천들이 없다는 설명을 했다. 그런데 현지선교사는 불과 3명 뿐이라는 말에 놀랐다. 우리교단뿐아니라 타 교단에서도 빨리 선교사들을 파송해야한다는 막연한 생각이 스치는 가운데 우리는 미군부대에 도착을 했다. 선교사의 설명은 현재 구호물자를 나누는 일이 위험하여 미군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불가하다는 설명을 들어 아마도 물자만을 내려놓고 나올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터라 큰기대를 하지 않았다. 얼마안있어 미군들안에 한국인들도 끼여 있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군목이 한국사람이었는데 함중위라는 분이었다. 미군들도 이 나라를 돕기위해 왔는데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입장이라서 군목들의 역할이 특별히 필요한 때임을 생각하며 이 부대의 영적인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는 군목을 위해 기도를 했다.
기대밖에 구호물건이 너무 많아서 인지 미국 1개 소대의 호위와 2대의 장갑차 호위를 받으며 우리는 구호물건을 나누기 위해 가장 어려운 지역인 빈민촌인 솔레익시티로 갔다. 군인들은 도착하자 일사분란하게 바리케이트를 쳤다. 우리는 앙님촌의 사람들이 줄을 서는 것을 보면서 옥수수 가루를 5개씩 나누기 시작하였다. 질서는 미군과 유엔군 덕분에 잘 유지되었다. 몇 분 후 미군소대장이 우리에게 나누어주는 시간이 많지 않다고 하면서 1박스 씩 나눌 것을 요구하였다. 우리는 남자도 들고 가기 어려운 분량의 옥수수 가루를 한 푸대씩 나누어 주기 시작하였다. 약한 여자들이나 아이들 머리위에 무거운 옥수수 가루 한 포대를 올려놓아야 한다. 어린아이는 비틀거리다가 쓰러져 소망교회에서 온 박도연집사님의 도움을 받아 집까지 배달해 주었다. 도와준 박집사님은 사진을 찍어왔는데 텐트 안에는 박스조각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줄은 어느덧 천 명이 훨씬 넘어보이는 난민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줄을 선 사람들 가운데 젊은 여성은 거의가 임신 중이었다. 나아 키울 수 없어 아이를 버리는 여성들이 분명 많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많은 고아원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물건은 이제 옥수수가루에서 식용류로 통조림으로 빵으로 바뀌어 나누이면서 아직도 500포대의 쌀과 한 차분의 분량이 남아있어 1,500여명이상을 주고도 남을 분량이다. 우리는 약 6만불어치의 구호물건을 싣고 왔다. 3,000명은 족히 나누어줄 수 있는 분량이었다. 그러나 1,000명이 오고나서 부터는 질서가 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많은 물건이 남아 있을 것을 상상치 못한 그들은 한차의 분량이 떨어져 나가자 자기차례가 오지 않는다는 판단아래 앞으로 옆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군인들은 다급하게 우리에게 청수 명령을 내렸다. 정말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지난 8년간 미국과 한국에서 1,000여명에게 밥을 나누어주던 노하우도 폭도들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말이 통하질 않으니 소리를 칠수도 없었다. 우리는 시급히 그곳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동족끼리 누구하나 이러면 안된다고 호소하는 사람도 없었다. 질서를 잡으려는 원로의 모습도 안보였다. 어른이나 지도자들이 없었다. 질서만 유지되었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을터인데... 미군들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았다면 더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미군하니까 군목, 함중위가 생각이 난다.
미국부대로 돌아와 남은 물건은 박선교사집으로 가지고 갔다. 박병준 선교사 센터에는 무척 넓었다. 방이 6개 정도이며 넓은 거실이 있는데 한 달에 500불의 렌트비를 낸다고 한다. 지금은 지진이 나서 1,500불은 나간다고 한다. 저녁식사는 컵라면, 김치도 없었다. 감사함으로 식사를 한 후 함께 앞으로의 비전을 나누며 기도하고 꿈나라로... 모기장이 있어서 모기에는 물리지 않아 좋았고 전기가 나가서 발전기로 전기를 공급하는데 11시에 발전기를 꺼서 모두 잠이 들었다.
(이틀째 아이티 현장에서)
새벽 6시에 일어나 경건회를 마치고 오늘의 일들을 의논하니 물건을 일단 박선교사 집에 내려놓고 어려운 고아원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의견이 모여졌다. 소망교회와 우리가 가지고 온 구호물건들은 거의 나누어졌는데 광염교회에서 버내온 물품들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일단 구호품들을 박선교사집겸센터에 내려놓았다. 물품이 너무 많아 힘이 들었다. 이 물건들을 난민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힘이 들지는 않을텐데.. 그러나 더 필요한 지역으로 간다니... 버스에 올라 오늘은 지진 피해지역인 대통령궁을 가 보기로 하였다. 박선교사 집에서 먼저는 백삼숙 선교사가 운영하는 고아원을 방문키로 했다. 고아원에 도착을 하니 주변의 건물들은 많이 무너졌는데 아이티어린이집은 무너지지 않았다. 10명의 고아들이 잘 자라나고 있었다. 백선교사에게 후원 상황에 대해 물었더니 후원하는 교회도 없고 개인도 별로 없다고 한다. 선교사의 말이니 그대로 믿기로 하고 아이들 개인 사진을 찍었다. 일대일 결연을 맺을 경우 일 인당 $30, 10명의 후원자를 우선 모아 고아원을 지원할 생각이었다. 고아원을 나올때 $200을 선교사님에게 주면서 아마 계속 지원이 될거라고 말했다. 말이 너무 빨랐나?? 이역만리에 와서 고아원을 운영한다는 것은 여자 혼자 힘으로 어렵지 않겠나? 우리도 무언가를 돕고 싶었다. 한번 뿐 아니라 계속적으로..
대통령궁으로 가는 길은 차도 많고 사람도 많아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다. 이제는 모든 것들이 거의 정상화되에 가는 것 같다. 물론 원상복귀를 하는데 10년이 더 걸릴지 모른다. 이 악몽 속에서 속히 벗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지만 모두들 왔다 갔다만 하는 것 처럼 보였다. 가장 어려운 지역인 솔레익시티 판자촌을 지나면서 어떻게 이렇게 못사는 나라도 있는가 싶었다. 머리에 물을 이고 다니며 물 한잔을 파는 아줌마도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사는지? 과일이란 과일은 먹을 만한 것들이 없이 버릴 것만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저 빈둥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일할 곳도 갈 곳도 없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다운타운으로 들어서니 망가진 건물들이 하나둘 보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이민국으로 아이티를 떠나려는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이었다. 30만명은 죽고 30만명은 다치고 30만명은 국외로 탈출을 하고 아이티의 수도 포타프린스에는 100만명 정도만이 남았을거라는 선교사의 전언이다.
대통령궁에 가까이 다가서자 정부기관인 어떤 건물에 몇 사람들이 건물위에서 맨손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시체가 보였다. 분명한 사람의 시체였다. 썩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에 파리떼와 구더기떼들이 몰려들고 있는데 누구 하나 치울 사람이 없었다. 정부 청사들이 모두 무너지고 죽고 그랬다. 큰 성당도 무너졌다. 주교도 죽었다고 한다. 대통령궁은 그 규모가 어마 어마 했다. 이 가난한 나라에 무슨 대통령궁이 저리도 크고 호화스럽게 지었는지 아마도 하나님이 지도자들을 심판하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웅장한 건물을 자랑하는 캐토릭성당도 여지 없이 무너졌다. 교회건물을 자랑하는 세속화된 성직자도 하나님은 심판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삶을 나누며 함께 고민하는 목회자들에게 오히려 기대를 걸어본다. 하루속히 한인선교사들이 들어와 그들과 삶을 나누며 함께 꿈꾸는 아이티를 그려본다. 그곳에서 주택가로 넘어오는데 좋은 주택가들이 거의 무너졌다. 시체 썩는 역한 냄새들이 코를 찔렀다. 마스크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다음에 간곳은 아이티의 경제도시였다. 처절하게 무너진 경제도시를 보면서 인간이 세운 모든 경제도시는 이와같이 처참하게 무너질 것을 예언한 요한계시록이 생각났다. 쇼핑센터들과 은행들 호텔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있는 자들이 더 많은 피해를 보았다. 그로 인해 국민들이 받는 고통은 어떤가 부패한 지도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노려움을 보는 것 같았다. 정말 정부는 아무일도 하지 않고 모든 백성들은 속수무책으로 지낼 수밖에 없는 무능한 정부에 국민들이었다. 그동안 바삐 움직였던 구호팀들도 모두 철수 하였고 아이티는 그저 장사꾼들외에는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없고 그저 적막한 도시였다. 아픔과 슬품을 딛고 일어선 무언가가 이제 일어나리라는 기대는 전혀 없는 그런 도시였다. 미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많은 이웃나라들이 손을 잡아야 겨우 일어설 수 있는 그런 나라였다.
(삼 일째, 아이티현장에서)
목요일 오전에는 고아원 4군데를 돌며 과자와 또 다른 구호품을 전해주었다. 리라꽈 란 동네에는 고아원이 30 군데나 있다고 하는데 오후에는 도미니카로 출발을 해야 하는 관계로 몇 군데만 열악한 고아원 현장을 살펴보면서 우리 대한민국과 미국에서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빈민촌 아이들 사진을 찍으며 옆에 같이 있기가 미안해 살며시 손 한 번씩을 꼭 쥐어 보았다. 고아원에 다니면 계속 우는 아이들이 있었다. 이번 지진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적응을 잘 하지 못하고 울기만 한다는 원장의 말에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 우리가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지...
한국의 요즘 고아원은 일반 가정들 보다 모든 지원을 정부가 잘해주고 있으며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공부도 잘 가르치고 있는데 너무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아이티 고아들, 이제 3월8일에 다시 와서 도움을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시는 도우미가 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한다. 우리 소중한 사람들에서 내일의 꿈나무들인 어린이들에게 좋은 토양을 만들어 주기를 위해 기도하면서 결연자들을 찾아 나갈 것이다. 이미 고아원을 위해서 헌신을 하고자 하는 후원자는 있어 3월에 고아원이 오픈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돌아오는 길)
아이티에서 국경을 거쳐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돌아와 하루를 자고 그 다음 날 후로리다를 거쳐 로스앤젤레스 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날 비행기 안에서 앞으로 할 일에 대해 몇 가지 정리를 했다.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구호품이다. 그보다 먼저 물과 빵일 것이다. 그리고 가족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활필수품이다. 그것들을 적시에 지급해 주어야 한다. 지금 세계 각국에서는 많은 물자들이 아이티로 들어오고 있다. 최소한 한국성결교단과 미주총회 그리고 한국교회들과 교단 선교회들은 들어가는 물건들이 사전 협의를 거쳐야 한다. 노수자사역을 오래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물건으로 전달해주고 자신이 직접 물건을 전달해주기를 원하는 단체나 교회가 있다. 이것은 선교회나 사역자들을 불신하는 풍조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이번에 우리가 경험한 바로는 절대 물건을 각기 구입해서 들여보내서는 안될것이다. 아이티현지나 도미니카공화국에 있는 현지선교사와 협의를 해야하는데 각교단에서 파송한 선교사가 아니니 평소 알지 못하니 어느 교회는 직접 도미니카현지에서 물건을 구입하여 아이티로 들어갔다. 나누어 줄때는 어느 가정은 옥수수가루만, 어느가정은 생선통조림만, 빵만, 식수만 이렇게 물건을 나누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아이티 난민들은 지혜롭게 그것들은 서로 나누어 가질 것을 기대하면 안된다. 이 모든 것들을 패케지로 만들어 보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미니카공화국 현지선교사와 사전 연락을 취해 물건을 오더하고 돈을 보내야 한다. 도미니카공화국이나 아아티선교사들 모두 믿을만한 사람들이다. 미리 물품들을 준비하도록 반 정도의 돈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나누어 중때는 아주 신숙하게 미군의 도움을 받아 나눈다면 아마 한시간 이내로 2,000명분은 나눌수 있다. 우리가 매주 월요일과 주일에 서울역에서 무료급식을 하는데 예배와 식사를 포함 한시간을 넘기지 않고 1,000명의 노숙자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간다. 문제는 나누어주는 사람들에게 있다. 사전에 많은 준비와 반드시 현지선교사들과 협의를 거쳐야 한다. 현지 선교사와의 연락은 미국을 거쳐야 아이티로 들어가기 때문에 미주총회사회복지부와 사전에 연락을 취하고 미주총회에서 도미니카나 아이티선교사와 연락을 취해서 구호품을 전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두 번째는 교회 병원 학교 고아원이 포함된 센터를 세우는 일이다. 여기에는 현지에서 현재 운영하는 곳을 지원하는 방법이 있다. 현지인과 합작을 하는 것이다. 돈을 지원해주면 운영권도 거의 갖게 된다. 그리고 잘되면 차후 현지에 법인을 세워 선교국에서 괸리하도록 하는 방법도 있다. 이것은 현지선교사와 긴밀한 연락이 필요하고 현지선교사가 감독지도를 잘 해야한다. 또 하나는 직접 센터 땅을 구입하고 센터를 건축하는 일이다. 그러려면 선교사를 반드시 파송해야 한다. 전문적인 평신도선교사를 1년 단위로 파송해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는 모든 것이 너무 열악해서 젊은 선교사보다는 오히려 나이가 든 선교사가 좋다. 건축을 하고 현지인들을 잘 가르치는 선교사가 우선 파송되어야 전체사역을 할 수 있다. 방학 때는 미국이나 한국에서 대량 학생봉사자들이 투입되는 방안도 모색해 볼만하다. 우리교단의 경우 이번기회에 자녀교육 끝난 선교사 한, 두가정 파송하는 방안도 좋을 것이다. 언어는 영어를 약간 하면 좋다. 현지 통역을 세우면 된다. 빠른 시간내에 이루어질수록 좋다.
세 번째는 복지선교의 장기적인 안목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 외국선교사들이 왔을때 학교와 병원 고아원을 세웠다. 그리고 수많은 밀가루와 옥수수가루를 공급하여 주었다. 그러나 우리의 선교방법은 먼저 교회를 세우고 신학교를 세우는 일에만 전념을 하였다. 아이티에 필요한 것은 우선 학교와 병원 그리고 고아원이다. 학교에서도 예배를 병원에서도 고아원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러면 교회는 자연히 생기게 되고 부흥하게 된다. 우선은 아이티인들에게 사랑 받는 종교로서 기독교가 서야 한다. 이번 기회에 한국의 기독교와 우리교단이 헌법27조에 나와 있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 힘주시는 대로 사람을 긍휼히 여겨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며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며 병든 자와 옥에 갇힌 자를 방문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아이티에 실천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집으로 돌아왔다.